임오군란의 배경
1876년 조선은 일본과 어쩔 수 없이 강화도 조약을 맺게 된다. 이 조약을 맺은 후 일본의 간섭이 조금씩 심해지게 되는데 조선 내에서도 개화파와 위정척사파로 파벌의 갈등이 심해지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조선 조정은 군사체계를 개편하는데 오군영을 2영으로 통폐합시키고 일본의 후원 등으로 별기군이라는 새로운 신식 군대를 창설하게 된다. 이 군대는 호리모토 레이조에 의해 훈련을 받았는데 신식 군대라 그런지 원래 있었던 조선의 구식 군인들에 비해 엄청난 대우를 받게 된다. 구식 군인들은 차별 속에서도 계속 버텨냈지만 급료까지 밀리는 상황이 벌어지자 조선 조정과 별기군에 대해 반감을 가지게 된다. 이 와중에 고종은 순종과 민씨의 혼수품으로 비단을 구매하는데 이걸 구매한다고 대량의 금액을 써버 린다. 하지만 이렇게 쓰면서도 구식 군인들에게는 급여를 밀리는 등 황당한 일이 벌어진다. 그렇게 구식 군인들은 겨우 쌀을 지급받게 되는데 이 쌀이 이때까지 밀렸던 급료에 절반도 안 되는 것이었다. 여기서 끝나도 화가 날 텐데 쌀 안에는 모래가 있거나 겨가 반이나 섞여있는 등 군인들을 분노하게 만들었다. 구식 군인들 중 김춘영과 유복만이 이 쌀 수령을 거부하고 선혜청으로 찾아간다. 찾아간 후 제대로 된 쌀을 달라고 요구하지만 담당자는 절대 못 준다며 돌아가라고 한다. 이 말을 들은 군인들은 결국 폭발하게 되고 선혜청에 있던 관리들을 폭행해버린다.
조선 조정의 대처 미흡
실제로 이 선혜청 폭행이 있고 난 뒤 이 일은 바로 조선 임금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고종은 이 얘기를 듣고는 구식 군인들이 폭발할 만 했다며 이해하기는 하였다. 하지만 따로 구식 군인들에게 이때까지의 쌀을 모두 지급하고 사과하지는 않았다. 진작 이렇게 사과하였다면 임오군란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이때 당시 조선 조정은 이 일을 완벽하게 파악하고 있었지만 행정력이 뒤떨어지고 부정부패가 심했기 때문에 대처가 미흡하지 않았나 싶다. 그렇게 선혜청 관리들을 폭행 한 김춘영과 유복만 등 군인들은 뭇매질을 당하고 감옥에 가치게 된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죽게 될 거 같다는 소식을 들은 구식 군인들은 폭발하게 된다. 그들은 김장손과 유춘만의 주도하에 쌀을 제대로 주지 않았던 민겸호의 자택을 습격 및 약탈하고 흥선대원군을 찾아간다. 찾아가 협조를 요청했고 흥선대원군을 그들을 달랬다. 하지만 유춘만과 김장손 등은 여기서 끝나지 않고 구식 군인 300명과 함께 동별영의 무기고를 부순 후 무기들을 탈취하였다. 그렇게 그들은 무장하였고 3군으로 나눈 뒤 조선 군대를 습격한다. 제1군은 포도청과 의금부를 습격하였고 갇혀 있던 유복만과 김춘영 그리고 위정척사파 인물들을 모두 풀어주었다. 제2군은 개화파 인물들과 민 씨 일가의 자택을 습격하였다. 3군은 경기에 있던 감영의 무기고를 박살 낸 후 일반 백성과 합세하여 만 명에 이르는 군대를 만든다. 그렇게 일본 공사관에 습격해 호리모토 소위를 살해 및 별기군 조교들까지 없애버린다. 여기서 끝날 수 있었겠지만 구식 군인들의 분노를 상당했는 듯하다.
조선 궁궐 습격
구식 군인들은 궁궐까지 습격하기에 이른다. 그들은 민창식과 이최응 등 개화파를 없애버렸고 창덕궁까지 들어가 민겸호와 김보현까지 없애버린다. 이 상황 속에서 그들을 막아서는 군사가 없었는 걸 보면 이 당시 조선의 상황이 얼마나 처참했는지 알 수 있다. 그렇게 흥선대원군을 지지하던 구식 군인들의 뜻대로 흥선대원군은 입궐을 하게 되었고 다시 섭정 통치를 시작하게 된다. 이렇게 임오군란은 성공적으로 끝나나 싶었지만 청나라군의 파병으로 다시 위기를 맞는다. 청나라군이 흥선대원군을 납치하게 되었고 섭정 통치를 한 지 얼마 되지도 않고 끝나게 된다. 그렇게 민씨는 다시 궁궐로 돌아오게 되고 임오군란의 세력들을 처단하면서 임오군란은 실패로 끝난다. 그리곤 일본 공사관에서 일본군을 습격했기 때문에 이에 대해 일본군은 배상과 책임을 요청하였고 조선은 일본과 어쩔 수 없이 제물포 조약을 맺게 된다. 그렇게 임오군란은 안타깝게 끝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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