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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산벌 전투, 백제의 용감했던 정신이 담겨있는 전투

by 아티브로 2022. 8. 15.

황산벌-전투-사진
구글-출처-황산벌-전투

계백의 전투 준비

황산벌 전투는 백제의 마지막 전투라고 볼 수 있는 전투다. 660년 7월 9일에 일어난 전쟁으로 백제와 신라간의 전투라고 볼 수 있다. 지금 위치로 보자면 충청남도 논산시 황산벌이다. 이 전투를 한 이유는 신라의 백제 수도 진격을 막기 위해서였는데 결국 막아내진 못하였다. 당시 신라에서 최고의 명장이라 불리던 김유신이 이 전투에 참가한다. 그는 당시 5만 정도의 병사를 이끌고 황산벌로 향하였다. 이상한 낌새를 알아차린 백제는 계백 장군과 상영에게 군사를 내어준다. 그 수는 5천 명 정도밖에 안 되었는데 5만에 비하면 10배나 모자란 숫자이다. 계백은 수적 열세로 인하여 들판에서 싸우기를 꺼려했는데 그래서 그런지 험지에서 김유신을 기다렸다. 손자병법에도 산지를 고집하는 이유가 있는데 왜냐하면 그들이 보기엔 산지에서 싸우는 게 요새와 같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계백은 유명한 일화가 있다. 전쟁에 나가기 전 자신의 처자식들을 모두 죽이고 나가는데 이 이유는 신라의 포로가 될 바에는 죽는 게 낫다는 생각을 했던 거 같다. 

 

황산벌 전투 시작

7월 9일, 그디어 전투가 시작된다. 신라군은 하루 동안 황산벌에서 백제군을 4차례 공격한다. 하지만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백제군은 생각보다 잘 싸웠다. 4번 모두 신라를 패퇴시켰다. 이 이유도 많이 나뉘는데 신라는 이쪽 지형을 잘 모르는 이유도 있었고 백제 땅이었기 때문에 더 잘 싸웠다는 이유도 있다. 이는 후에 문무왕릉비에도 기록이 나온다. 백제군이 마치 고슴도치와 흡사하게 싸웠다는 내용인데 기록이 이렇게 적힐 정도면 얼마나 촘촘하고 굳세게 싸웠는지 알 수 있다. 신라는 빠르게 싸우고 끝날 줄 알았던 전투가 몇 번의 패배가 오가니 사기가 떨어진다. 그들은 빠르게 황산벌을 함락 후 당군과 합류했어야 하는데 시간이 늦어져 더 초조해진다. 이에 신라군은 관창과 김반굴을 백제로 돌격시킨다. 첫 돌격 때 김반굴은 전사하게 된다. 그리고 관창마저 붙잡히게 되지만 풀려난다. 관창은 포기하지 않고 다시 돌격했으나 또다시 백제군에게 잡히게 되며 목이 잘려 나간다. 신라군은 더욱 초조함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4차례 공격을 막아낸 백제군도 상황이 녹록지 않았다. 그들은 4차례 공격을 막으면서 잃은 병사들과 애초에 많지 않았었던 병력들 때문이다. 그렇게 신라군은 총공세를 하고 백제의 결사대들은 5차 공격을 막지 못하며 전멸한다. 4차례 공격을 막긴 했지만 크게 보자면 황산벌 전투는 하루밖에 지나지 않았던 전투였다. 하지만 10배가 차이나는 병력을 4차례 막아낸 것도 기적이라는 평가가 다분하다. 그렇게 황산벌은 함락당하게 된다. 신라는 사비성으로 향하게 되고 당군과 합류하며 사비성마저 무너트린다. 의자왕은 방어를 위해 웅진으로 미리 대피했지만 예식진이라는 인물의 배신으로 사로잡힌다. 그렇게 백제는 찬란했던 역사를 뒤로 한 채 멸망한다.

 

황산벌 전투 후기

황산벌 전투는 역사적으로 볼때도 의의가 있는 전투이다. 왜냐하면 보통 수적 열세가 심할 때 도망치기 십상이지만 백제의 결사대는 그렇지 않았다. 심지어 10배가 차이나는 병력에도 4차례나 신라군의 공격을 막아내며 관창과 김반굴 등 적들을 섬멸한다. 신라군은 무수한 병력이 있음에도 초조해했고 결국 마지막 공세에 백제군은 무너지게 된다. 하지만 이 전투가 있었음에 훗날 우리들은 백제의 정신을 기억하고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냥 나라가 망한 게 아닌 끝까지 결사대로 자신들의 나라를 지키다 전멸 한 정신이 백제를 나타내 준다. 그 당시 죽을 걸 알면서도 싸운 병사들의 용기가 나에게도 전해지는 느낌이 들며 황산벌 전투 후기를 마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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